보건관리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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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관리자의 하루
글. 김정은
- 서울메트로 9호선 보건관리자
몇 개월 전, 나는 서울을 벗어난 외곽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에서 대중교통 배차 간격 때문에 지각이 일상화될까 걱정에 사로잡힌 나는, 10시~19시 유연근무제를 신청하여 좀 길어지기는 했지만 여유로운 마음으로 통근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마치 지난해 ‘당신을 추앙 합니다’로 마음의 큰 울림을 주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3남매의 모습처럼, 나도 수도권 외곽에 살며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수많은 직장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많은 이들의 생활 터전인 주거지와 도심지인 서울을 연결해주어 ‘수도권’의 탄생을 알린 데에는 서울지하철이 주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지하철 운행은 올해로 49주년을 맞이했을 만큼 역사가 긴데, 그중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9호선은 서울지하철의 막내 라인이며, 2009년 7월 개통 이래 열다섯 살이 된 청소년기를 보내는 중이다. 회사의 상징 색깔인 황금색은 부의 대명사 강남 노른자 지역 일대를 통과하는 노선이라는 중의적 의미와 함께 ‘황금라인’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9호선의 급행서비스는 강서-강동 구간을 빠르게 이어주어 ‘시민의 발’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있는데, 이런 안정적인 운행에는 보이지 않는 근로자들의 숨은 노력들이 수반된다. 지하철은 영업 종료(역 폐장) 이후, 단전 시간이 있는데, 이는 열차 운행을 종료하고 3시간 남짓 각 분야에서 선로 내로 진입하여 각종 통신기기 점검, 열차의 선로 방향을 바꾸는 선로전환기 점검, 열차에 전기를 제공하는 터널 천정부에 설계된 전차선 점검작업 등,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을 말한다. 이렇듯 9호선의 밤은 누군가의 황금빛 출퇴근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는 시간이다.
<열차 방향을 바꾸는 선로전환기 점검작업>
이 치열한 준비 작업 속에는 ‘작업자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핵심 가치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비록 보건관리자가 직접 작업에 투입되는 인력은 아니지만, 건강한 작업환경 조성으로 투명한 울타리가 되어 근로자와 늘 함께 있는 셈이다.
특히 터널 유지보수 작업근로자들은 호흡기계 건강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근무환경이 열악하다는 공통적인 호소를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열차 선로는 매일 수십 차례 달리는 열차 바퀴로 인해 마모가 일어난다. 마모율이 심해질수록 소음 발생과 열차 탈선이라는 위험요인도 생기기 때문에 연간 1~2회에 걸쳐 레일을 정교하게 다듬는 연마작업을 한다. 연마작업은 대형 장비 차량 바퀴에 거대한 연마석을 널찍하게 부착하여 선로 위를 매끄러워질 때까지 여러 번 왕복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희뿌연 분진과 미세먼지, 쇳가루를 마구 분출해내고 쇳가루는 선로 주변에 소복이 쌓이게 된다. 이걸 매일 보는 근로자들의 생각은 당연히 ‘내가 이 쇳가루를 마시고 있구나’ 일 것이고 건강에 대한 요구도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새내기 보건관리자였을 때, 야간 작업환경측정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에이, 맨날 정상으로 나오는 이런 거는 뭐하러 해. 어차피 문제없는 걸로 만들 거면 이거 할 돈으로 회식이나 시켜줘. 소고기로~ ”라는 말을 듣는데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이라면, 작업장 안전 확인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술과 소고기 섭취는 입만 즐거울 뿐이고, 측정은 미래건강에 대한 값진 투자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하겠지만 내심 서운한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법에서 규정지어 놓은 보건관리자의 업무와 근로자 간의 이해의 괴리가 발생하는 그 지점이 바로 보건관리자의 역할이 시작되는 지점이 아닐까?
보건관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적이나 일삼는 고문관처럼 비춰지겠지만,
교육과 소통을 통한 꾸준한 이해가 동반된다면, 보건관리자는 점검을 통한 건강파수꾼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소견자의 건강상담도 현장 조사 및 현장 개선을 위한 부서 업무협의도, 측정 결과나 조사 결과 근로자 결과 공지, 공생협의체 업무협의까지 결국 보건관리자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업무가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서류작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라도 위험요인 발굴과 개선이라는 차원에서 현장 순회 점검도 일과 중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 회사는 작업환경이 지하이고 자연 암석, 토양에서 발생하는 라돈으로 인해 폐암 발병의 위험성이 있는데, 특히 라돈은 물에 잘 녹는 성향을 지녔으므로 생활하수를 모아놓는 집수정에 유량이 많아지면 라돈 수치가 높아진다. 그래서 구멍이 뻥뻥 뚫린 그레이팅 덮개 위에 고무판을 설치하여 라돈이 기화하지 않도록 조치했었는데, 외주작업자들이 집수정 오물 제거 작업 후 고무판 덮개를 원상태로 복구하지 않고 작업을 종료한 적이 있다. 이는 라돈 보호조치가 가동을 멈췄던 경우가 되는데, 이후로도
- 1)근로자들이 그레이팅이 노출되어있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 2)라돈이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아무 느낌이 없어 보호구 착용이 소홀한 것,
- 3)작업이 금방 끝나니까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거나
- 4)다른 사람이 원상복구 하겠지, 귀찮아.
등 다양한 이유로 방치된 사례이다. 이렇듯 환경이 열악하다고 호소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근로자들을 위해 반복된 점검과 교육도 필수인것이다.
<그레이팅의 고무판 덮개가 마구 어질러진 모습- 라돈 노출 위험>
이런 이유로, 근로자 보호 조치들이 제대로 가동하고 있는지 현장도 살펴보고 반복적인 절차 확인을 하는 것이 직업성질병을 예방하는 보건관리자의 일과이다.
<그레이팅의 고무판 덮개를 꼼꼼히 덮어놓은 후- 라돈 노출 위험 저감>
현장은 생소하고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보건관리자의 강점은 사람을 중심으로 케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본기가 다져진 건강파수꾼이 아닌가! 근로자의 하소연 안에는 답이 있는 경우가 많다.
경영진 보고 및 부서와의 협의를 통해 그 둘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 보건관리자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나는 근로자의 이야기를 들으러 회사로 출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