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쓸모있는 의료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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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m(해), Hazard(유해), 그리고 Risk(위험)
글. 오재일
- 경기의료원파주병원 근로자건강증진센터
해, 피해, 위해, 손상, 유해, 위험... 직업환경의학, 산업위생, 환경보건 분야에서는 이 단어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질병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이 용어들은 비슷한 의미로 혼용되는 경우가 많고 화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용어에 따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영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먼저 ‘harm’은 인체나 환경에 가해지는 ‘damage’이다. ‘harm’의 크기는 치료기간이나 경제적 손실로 측정할 수 있다. ‘hazard’는 ‘harm’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risk’는 ‘hazard’의 ‘damage’가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용어의 정의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
첫째
‘hazard’는 물질,
환경 등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 해당한다. -
둘째
‘risk’에는 확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
셋째
‘harm’은 ‘hazard’에
내재되어 있던 ‘damage’가
발현된 결과이며
‘risk’에 포함되어 있던
가능성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상어는 그 자체로 사람에게 ‘harm’을 줄 수 있는 ‘hazard’이다. 그러나 서울 시민에게 상어는 위험하지 않다. 즉 상어에 의한 ‘risk’는 제로이다. 이는 ‘hazard’로서의 상어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상어에 노출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risk’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 시민이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간다면 상어의 ‘risk’는 증가한다. 상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risk’를 어떻게 해야 줄일 수 있을까? 앞에서 ‘risk’는 ‘hazard’의 ‘damage’가 실현될 가능성이라고 하였다. ‘risk’의 정의에서 우리는 ‘risk’를 줄이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hazard’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hazard’는 개념상 사물이나 환경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특정 ‘hazard’를 무해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hazard’를 제거한 후 필요하다면 무해한 물질로 ‘hazard’를 대체한다. 이런 방식의 대체가 불가능한 경우 상대적으로 ‘damage’가 적은 다른 ‘hazard’로 대체할 수도 있다.
두 번째 방법‘hazard’가 실현될 가능성을 낮추는 것, 즉 노출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다.
‘hazard’를 제거하지 않아도 ‘hazard’에 노출이 되지 않으면 ‘risk’는 제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자는 쪽의 논리와 원자력 발전을 폐지하자는 쪽의 논리를 소개하겠다. 원전은 심각한 ‘hazard’이다. 원전 사고에 의한 ‘damage’는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이미 확인되었으며, 여기에 대해서는 원전을 유지하자는 쪽과 원전을 폐지하자는 쪽의 의견이 서로 다르지 않다. 다만 원전을 유지하자는 쪽은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면 ‘risk’ 관리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방사능이 유출될 가능성을 낮추면 원전의 ‘risk’도 같이 낮아지기 때문에 안전관리를 통해 방사능이 유출될 확률을 제로에 가깝게 떨어뜨리면 ‘risk’도 제로에 수렴한다는 논리이다. 반면 원전 폐쇄를 주장하는 쪽의 논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방사능 유출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 수 없으며, 설령 유출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게 만든다고 해도 방사선 유출 시 입게 되는 ‘damage’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risk’는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전 폐쇄, 즉 ‘hazard’를 제거하여 ‘risk’를 제로로 만드는 방법 외에 원전 ‘risk’를 관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risk’ 관리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원전 폐쇄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원전을 대체할 적절한 에너지원이 없다면 안전관리를 통해 ‘risk’를 낮춘 상태에서 원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사업장에서의 ‘risk’ 관리 방법도 원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첫 번째 방법은 공학적 격리, 보호구 착용, 근무시간 축소 등을 통해 근로자가 ‘hazard’에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를 줄여 ‘risk’를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근로자에게 ‘damage를 줄 수 있는 ‘hazard’, 예를 들면, 유기용매, 소음 등을 없애는 방법으로 ‘risk’를 제거하는 것이다. 소음이라는 ‘hazard’가 있는 사업장은 소음의 원인이 되는 오래된 설비를 뜯어내는 것이 소음성 난청을 관리하는 가장 확실한 대책이고 유기용매 중독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성이 높은 유기용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현재 사용 중인 유해물질을 대체할 물질이 없는 경우가 많고, 대체할 물질이 있어도 이들 물질들은 대부분 기존에 사용하던 물질보다 비싸기 때문에 사업장의 ‘hazard’를 제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밖에도 작업 특성 상 유해인자를 제거할 수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냉동 창고를 운영하는 사업주에게 저온이라는 ‘hazard’를 없애기 위해 냉동 창고의 온도를 영상으로 올리라고 할 수는 없다. 수중작업이나 고소작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현재 사업장의 ‘risk’ 관리는 ‘hazard’ 관리보다 노출 관리에 더 치중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hazard’를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hazard’ 관리는 ‘risk’ 관리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hazard’를 확인하는 과정(Hazard Identification)은 매우 중요한데, ‘hazard’를 모르면 ‘risk’를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지하지 못한 ‘risk’는 당연히 관리할 수도 없다.
‘risk’ 관리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원전은 폐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원전을 계속 가동하는 것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라는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다. 사업장의 ‘risk’ 관리도 마찬가지이다. 현장에서 유해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 방법이 불가능할 경우 노출 시 근로자에게 피해가 적게 가는 물질로 대체하는 것이 차선책이다. 노출관리를 통해 ‘risk’를 줄이는 방법은 산업현장의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공정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유해물질을 사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관련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특히, 독성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물질의 경우 유예 기간 을 두고 생산 및 수입, 그리고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대체물질의 개발과 사용을 유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치가 없다면 사업주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저렴하고 검증된 물질을 안전하지만 비싸고 검증 되지 않은 물질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