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0 No.5 2023 S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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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슈빈샘은 출근 두 번, 퇴근 두 번’

글. 이수빈

  • ㈜모트롤 기술환경팀 건강관리실 간호사 / 민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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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같은 시간이 되면 울리는 핸드폰 알람 진동
오늘도 똑같이 반복되는 풍경.
멍하니 진동 리듬 맞춰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몇 번 하고 핸드폰 알람 중지!
다시 누워 기지개 쭉 허리 비틀기, 손목 발목 돌리기 나름 잠 깨우는 스트레칭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움직임.
(이하 모두가 출근하기 전 행하는 절차를 나도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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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관리실 문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서면 그때부터 보건관리자 출근.
들어서면서부터 전등 켜고, 에어컨 켜고, 또 다른 방에 전등 켜고, 가운으로 갈아입고,
창문 열어 환기하고, 소독 분무기로 쓱쓱 뿌려 온몸에 소독 향기를 향수 대신 도포한 다음,
쓱쓱쓱쓱 항균 물티슈로 침대, 혈압계, 테이블 닦으며
첫 번째 출근 장소에서의 업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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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보리암 절에서 사온 물고기 모양 종을 풍경 삼아 입구에 달았더니 문을 여닫을 때마다 들리는 맑은소리.
마치 “건강관리실에 누구 들어 왔소이다~!” 하고 자연스레 인기척을 내주어 좋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들락이는 인기척들로 들려오는 맑고 청량한 풍경소리로
들어오는 이도, 안에서 맞이하는 이도 모두 힐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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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이곳에서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호칭들이 존재한다.
언니처럼 누나처럼 언제부턴가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보건관리자 간호사의 자리를 지켜온 세월이 30년이 되어 간다.
원조 산업간호사로 사업장 간호사 자리를 지켜 온 세월이 무색하게 아직도
나는 바쁘게 살고 있으니 출근도 두 번, 퇴근도 두 번 하는 것이겠지..

회사에서도 제일 나이 많은 여직원인데다 간호사이다 보니,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이 없어졌는지
“어깨랑 등에 파스 붙여주세요” 하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앞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 재끼고,
“허리에 파스 좀 붙여주세요” 하며 바지춤을 비집어 내리면서도 자연스럽다.
아픈 자리 잘 찾아서 파스 척척 붙여주는 내게 감사하며 하는 말
“샘 손은 우찌 그리 아픈 데를 잘 찾아내는지, 내 몸에 아픈 자리마다 뭔 표시가 납니꺼~”
굳이 ‘노하우’라고 할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냥 아픈데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 말 한마디 더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좋아지는 것 같다는 표현이
예전 배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 같다는 느낌이랄까?
올해부터 흰머리 감추는 염색을 중단했더니
거의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한몫 더 한 셈인 것 같기도 하고
혹자는 다시 염색하라고 하고 혹자는 어울린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예술가 같아 보인다고 한다.
또 다른 나의 출근지에 어울리는 이름인 슈빈샘처럼.

9시부터 6시까지 상담하고, 처치하고, 하소연 들어주고, 투약하고
자리에 앉았다 ‘딸랑딸랑’ 소리만 들리면 다시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
눕히면 발딱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매일 매일 반복되니 나의 두 다리는 더 굵어진다.
더군다나 코로나로 계속 끼고 있는 마스크에서도 해방되지 못한 채
온종일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하얀 머리카락 분홍가운에 감추고 사는 50 중반의 간호사.
갱년기증상으로 더웠다 추웠다 변덕스러운 몸의 변화는 티도 못 내는 일상들.

나이만 다르지,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보건관리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간호사들의 평범한 모습.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온 직원과 그 직원의 가족들까지 케어하며 상담하고,
같이 고민하고 아파하며 변화를 유도 시키고,
어떻게 해서든 건강한 회사생활을 돕고자 밤낮없이 울어대는 카톡에 대응해 주다 보면
잠자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신경이 회사와 직원들의 건강, 보건 환경에 집중되어있는
우리 산업간호사들의 노고에 선배 간호사로서 박수를 보내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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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식당으로 올라가 허기진 배를 대충 채우고 또 다른 곳으로 출근 준비하는 슈빈샘.
이제는 ‘간호사 슈빈샘’에서 ‘새샘민화 화실 슈빈샘’으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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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같이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부터 켜고, 창문 열고 환기한 뒤 에어컨 켜고, 앞치마 두르고 나면
나는 그림 그리는 간호사 슈빈샘이 되어 있다.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힐링이 필요한 회원들을 위한 화실에서 민화를 그리며
색채로 힐링하는 공간과 행복을 그리는 공간을 만들고,
한명 두명 수업하면서 그들 내면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는 또 다른 보건관리자의 역할을 하러
사업장에서 퇴근 후 화실로 다시 출근한 시간은 저녁 7시 10분.
하루가 넘어가기 전까지 ‘화실 슈빈샘’으로 힐링 케어를 하고,
화실에서 퇴근을 하는 시간은 11시 30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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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딸 방에 들어가 “엄마 왔다” 하고 둘이 꼭 껴안아 주는 딸과 나의 인사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쁘게 사는 나로 인해 집에서 나의 케어를 기다리는
남편과 딸을 위한 소소한 대화 시간은 거의 자정을 전후로 이루어진다.
이제부터는 퇴근과 출근이 아닌 나의 안식처에서 물 한잔과 과일 한쪽으로
하루일과를 공유하고 올빼미처럼 모여앉아 수다스럽지 않은 수다를 나눈다.
딸과의 소소한 대화, 남편과의 퇴근 후 일상들을 들으며 하루 24시간의 피곤함을 지우개로 지우는
소중한 시간은 길어야 1시간 남짓. 이 또한 우리 집의 보건관리자로서 나의 역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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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많은 일을 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에서 내가 본 간호사들은 특히나 24시간을 정말 바쁘게 사는 것 같다. 내 주변, 그리고 내가 속한 직업건강협회 경남지회 간호사들 모두 보건관리자 베테랑이며, 훌륭한 아내이자 멋진 엄마의 역할을 해낸다. 능력 있는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로서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며 자기 계발에도 아낌없이 투자하고, 24시간을 알차게 채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나의 하루는 소소한 하루살이와도 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50년 넘게 살면서 30년을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그중 사업장 보건관리자로 환자가 아닌 근로자를 보건 관리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열정이 있으면 50대의 나이도 20대처럼 바쁘게 살아갈 수 있다.

무덥고 잦은 비로 인해 습하던 날씨도 지나가고, 어느새 제법 햇빛의 강도와 하늘의 청명함이 달라져 보이는 계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결실을 준비하는 가을.
나의 봄이었던 청춘 20대와 여름인 3~40대를 보내고 어느덧 50대 중반이 되어 그동안 일궈왔던
내 인생의 가을걷이를 30년 산업간호사로 마무리하려 한다.
다가오는 겨울, 노년의 아름다운 일상을 청색이 아닌 노란색, 주황색으로 그려 나가는 슈빈샘의 화려한 출근을 기다리며,
오늘도 두 번 출근, 두 번 퇴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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