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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성 암은 의심할 때 보인다.
글. 오재일
- 박애병원 건강증진센터 센터장
우리나라의 2020년 암 연령표준화 발생률은 10만 명당 295.8명(남자 308.1명, 여자 297.4명)이다. 그렇다면 이중 직업적 노출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암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이 부분은 연구자와 대상 국가에 따라 꽤 차이가 난다. 암은 다양한 요인이 위험인자로 작용하고 잠복기 또한 길기에 석면 노출과 악성중피종의 관계처럼 유해 물질과 높은 특이적 연관성을 보이는 일부 암종을 제외하고는 직업적 요인을 발병 원인으로 특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담배와 폐암 사이의 연관성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암 발생의 4%가 직업적 노출이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미국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그 비율을 12%까지 추정하기도 하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 신청 시 가장 큰 문제점은 낮은 승인율이었다. 석면 관련 종사자나 광부에게서 발생한 악성중피종이나 폐암 정도만 산재 승인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 외의 신청은 승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승인율은 꾸준히 증가하여 2011년 24%수준이었던 승인율은 2019년에는 70.6%까지 증가하였다. 하지만 승인율을 제외한 나머지 지표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산업재해보상보험 가입인구 10만 명당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발생률은 1.8명으로 스위스의 3.5명, 덴마크의 4.9명, 이탈리아의 5.1명 보다 현저하게 낮다. 전체 산재사망자 중 직업성 암에 의한 사망자 수도 유럽에 비해 상당히 낮다. 앞에서 언급했던 전체 암 발생 중 직업성 암이 차지하는 비율도 0.1% 이하로 세계보건기구가 추산한 4%에 한참 못 미친다. 우리나라의 산재 신청 건 수 자체가 유럽 국가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이는 근로자들이 암에 걸렸을 때 직업적 노출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직업성 암을 ‘직업적으로 발암 인자에 노출되거나 현재까지 확실한 발암 인자를 특정하지는 못하였지만, 특정 직업군이나 산업에서 증가하는 암’ 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직업성 암 역시 다른 직업성 질병과 마찬가지로 노출과 질병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가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출이 있었고 그 노출과 연관성을 보이는 암에 걸렸다면 직업성 암을 의심해야 한다. 이 외에도 노출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희귀한 암 종이 발생한 경우나 일반적인 호발 연령에 비해 일찍 발생한 암 또한 직업성 암을 의심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사례가 다른 동료에게서도 발생하였다면 직업성 암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렇다면 승인 절차는 어떻게 될까? 직업성 암의 승인 절차는 근로자가 해당 지역 근로복지공단 지사에 산재 신청하면서 개시되며 다른 질병의 승인 절차와 다르지 않다. 산재 신청을 받은 지사는 재해조사를 실시하며 필요한 경우 역학조사 기관에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산재 심사는 근로복지공단 지사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경우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는 경우로 나누어지는데, 근로복지공단의 각 지사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심의를 의뢰한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의 결과는 지사를 거쳐 신청인에게 통보되며 신청인은 판정 결과에 불복하여 심사청구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공단 본부에서 업무 관련성 여부를 심의하게 된다. 그런데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자체적으로 역학조사를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재해조사서나 역학조사 보고서가 판정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된다. 재해조사서에는 직업력, 근무 환경 등에 대한 조사 결과가 기록되며 자문의는 이를 바탕으로 업무 관련성에 대한 소견을 기록한다. 역학조사결과 보고서에는 재해자의 직업력, 근무기록, 의무기록, 면담내용, 작업환경 측정 결과, 문헌조사 결과 등을 제시하고 재해조사서와 마찬가지로 업무와의 관련성에 대한 전문의의 의견이 마지막에 제시된다.
[출처] 근로복지공단
근로자가 산재를 승인받기 위해서는 본인의 질병의 원인이 직업적 노출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의심과 산재 신청의 불편을 감수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필자는 오히려 경한 질병의 근로자가 단기간의 요양 등을 목적으로 산재 신청을 하는 것을 자주 접한다. 신청에 부담이 없고 연관성을 비교적 쉽게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 진단받은 근로자가 암투병하면서 산재 승인 과정을 밟는 일은 쉽지 않다. 먼저 암에 걸렸다는 정신적인 충격과 힘든 항암치료 때문에 환자는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치료 기간이 긴 암 치료의 특성 때문에 사업장의 협조 없이는 치료에 전념하기 어려운 현실도 산재 신청을 꺼리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직업성 암이 의심되면 먼저 전문가에게 상담받을 것을 권한다. 변호사나 노무사와의 상담이 부담스럽다면 병원에 방문하여 산업재해 관련 전문의나 주치의와 상담하는 것도 좋다. 직업성 암으로 승인되면 근로자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근로자의 치료와 생계에 도움이 된다. 또한 근로자가 의심하지 않으면 직업성 암은 그냥 일반적인 암으로 남게 되고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암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직업성 암은 근로자 모두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때 예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