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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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이어주는 공감 대화
글. 김호
- (사)글로벌디아스포라 다문화코칭네트워크 사무국장
“우리 이성적으로 이야기 좀 하자.”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혹시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 등등 온갖 걱정이 갑자기 밀려오지 않나요? 이렇게 ‘이성적으로’라는 단어만 들어도 갑자기 몸이 경직되고 긴장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온전히 이성적일 수 있을까요? 이미 많은 연구는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Leslie S. Greenberg와 Sandra C. Paivio는 그들의 저서 ‘심리치료에서 정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책에서 “일단 기분이 경험되면 의식이 이를 반영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학습한 것을 정서적으로 지각된 것과 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라고 합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성적 판단이 정서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판단은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에 맡겨야 한다고 훈련받습니다. 하지만 사실 많은 연구는 정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일 것 같은 순간에도 인간이 얼마나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대한 예화가 있습니다. 이 예화는 자동차 판매왕이라고 불리는 영업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남들보다 많은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 영업사원들은 차량을 열심히 설명하기도 하고 고객이 받을 수 있는 혜택에 신경 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조건에서 훨씬 많은 자동차를 판매한 직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추운 겨울 고객들이 차를 시승하기 전에 미리 자동차 문손잡이를 헤어드라이어로 따뜻하게 덥혀놓은 것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차 손잡이를 처음 만졌을 때 사람과 악수하듯 온기를 느낀 고객들은 ‘이 차 느낌 좋은데?’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고, 그 좋은 느낌이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다른 직원들이 차의 사양과 혜택 등 온통 이성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 그 직원은 거기에 더해 고객의 ‘느낌’에도 집중했던 것입니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일은 굉장히 고민스럽고 향후 10년 가까이 바꾸지 않을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차를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들은 내가 가진 예산보다 너무 비싸지는 않은지,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 차량의 성능과 효율은 충분한지, 무엇보다도 가성비는 적절한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차를 구매하게 한 요인은 다름 아닌 ‘따뜻한 느낌’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단순히 이성적 대화와 정보로 소통하고자 할 때 판매왕이라고 불리는 직원은 감성과 온기로 소통하고자 했고, 이는 다분히 이성적 판단으로 보이는 자동차 구매에도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심리 상담의 현장에서는 상담 초기에 내담자가 ‘감정적으로 이해 받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그 상담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뭔가 힘듦을 토로하는 대화 상대에게 무엇이 불편하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라고 묻는 대신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얼마나 아프셨어요?’라는 말을 먼저 건넨다면 어떨까요? ‘어디가?’라는 말은 마치 그 사람을 기계처럼 대하고 단지 업무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것 같이 들리지만, ‘얼마나’라는 표현은 몸과 마음이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사회적 재난을 겪고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분들에게 심리 상담을 제공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일의 대상자이신 분들은 피해의식과 억울한 심정으로 가끔 도와드리고자 하는 상담사에게 울분을 토하며 화를 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들 세금 낭비하는 거 아니야!? 쓸데없이 뭐 하는 거야!?” 같이 굳이 내가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을 직접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뭔가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요, 저희는 도우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라고 문제 해결 중심적으로 말하기보다, 우선 감정을 알아주는 ‘얼마나’로 대화를 시작하면 확실히 대화는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얼마나 화가 많이 나셨어요? 정말 막막한 상황이라 저도 답답한 심정이 느껴지네요.”라고 첫 마디를 시작하면 그 후에 잠시 더 화내다가도 이내 “제가 선생님한테 이 말을 할 게 아닌데 하도 화가 치밀어오르니 본의 아니게 엉뚱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네요.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을 먼저 어루만지는 공감의 대화를 통해 반감이 호감으로 바뀌고 공감이 또 다른 공감으로 연결되는 경험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몸에서 거짓말을 잘하는 곳은 바로 뇌, 더 나아가 마음이라고 합니다. 위가 아프면 속이 쓰리거나 배가 아프고 뼈가 부러지면 그곳이 퉁퉁 붓고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아플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나곤 합니다. 너무 가슴 아픈 경험인데도 괜찮은 것처럼 외면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또는 엉뚱한 대상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몸에 통증을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 관심을 가져서 빨리 조처하게 만들어야 몸을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고통이 예상될 때 최대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거짓말을 합니다. 이 또한 그 불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이것을 ‘방어기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연 마음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 감정들은 산 채로 묻혀서 나중에 더 추한 방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야말로 방어기제 중 하나인 ‘전치’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내 뺨을 때린 대상에게 향하는 억하심정을 맘껏 쏟아낼 수 없다면 그 감정을 쏟아낼 다른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엉뚱한 대상에게 엉뚱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면 머리가 아프거나 신체적 질환으로까지 이어지는 ‘신체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대화를 풀어가는 사람 역시 대화가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갈등 상황에 놓이면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 어쩌지? 그러면 내가 무능한 사람이 될 것 같아’라는 생각에 불안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불안을 피하거나 감추려고 얼른 이성적인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춰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화의 첫 마디를 “얼마나”로 시작하는 감정의 언어로 채워봅시다. 이 대화가 감정을 어루만지는 더 건강한 공감 대화로 이어지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