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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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지키던 간호사에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키는 사람으로
글. 김혜란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노동조합위원장
처음 일산병원 심장계혈관집중치료실(CCU)에 발을 내디뎠던 날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촌각을 다투는 응급 상황 속에서 선배 간호사들은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정확하게 움직였고,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그 모습은 제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저 선배들처럼 전문성을 갖춘, 동료와 환자에게 신뢰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치열한 임상 현장에서 간호사로 성장해 가던 어느 날, 학생 시절부터 유독 관심을 가졌던 ‘지역사회 간호학’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을 넘어, 간호사가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건강을 예방적으로 지키고, 삶의 터전에서 건강한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일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산업안전보건법 강화에 따라 전임 보건관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습니다. 그때, 임상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일터라는 더 넓은 현장에서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산업간호사라는 새로운 길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보건관리자의 업무는 임상과 또 다른 전문성을 요구했습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서 나아가,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고 조직 전체의 건강 체계를 설계해야 했습니다. 이에 저는, 보다 깊이 있는 실무를 위해 가톨릭보건대학원에 진학했고 학업과 현장을 병행한 끝에 산업전문간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보건 영역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안전관리자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관점 차이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보건의 언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안전의 언어까지 이해해야 진정한 해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다시 책상에 앉아 공부를 이어간 끝에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보건과 안전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노력은 곧 현장의 신뢰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병원에서 안전보건팀장을 맡아 조직의 안전보건 시스템을 이끄는 소중한 기회도 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환경이 함께 받쳐 줄 때 비로소 보호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그 깨달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3교대 근무를 하던 후배 간호사가 특수건강진단에서 당뇨 진단을 받아 야간근무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해당 부서와 협의하며 야간근무 배제 절차를 안내하고, 직원이 치료와 회복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직업건강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직업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노동자가 아프지 않고 일할 권리, 아플 때는 온전히 보호받을 권리를 지켜 주는 일이라는 것을요.
안전보건팀장으로 일하며 보람도 컸지만, 동시에 실무자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도 자주 마주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그것이 제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누군가 바꿔 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고, 지금은 일산병원 노동조합위원장으로서 조합원들의 권익과 건강권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길은 늘 사람을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CCU에서는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를 지키고자 했고, 보건관리자로서는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으며, 지금은 제도와 규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의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맡은 역할은 달라졌지만, 그 중심에 있는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산업안전보건법을 접했을 때의 막막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차갑게만 느껴졌던 법과 제도는 결국 노동자를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여러분도 딱딱하고 차가운 법전 속의 글자들이 현장에서 따뜻한 보호막으로 변하는 순간순간마다, 보건관리자로서의 전문성이 찬란히 빛나고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소명을 다하고 계실 보건관리자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문성을 향한 여러분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 노력은 한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조직을 변화시키며, 결국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 모든 발걸음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