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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되풀이하는 심리에 대하여

글. 고윤화

  • 전주직업트라우마센터 임상심리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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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이번 사람은 정말 믿었는데?? 이젠 사람 자체를 못 믿게 될 것 같아요”
p씨는 상담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2달째 상담을 이어가던 p씨는 이전 연애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또다시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반복해서 나쁜 사람을 만나는 연애 패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알코올 중독인 남편으로부터 시달리다가 겨우 이혼 했는데....
이번 연인 역시 술 문제가 반복되는 상황, 그런데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 또한 알코올 문제가 있었더라는 식의 이야기.
심리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참 운이 없는 사람이네’ 라고만 생각했고 나 역시 운명을 탓하는 일이 많았다. 간혹 작가의 억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지만 실제로 드라마 같은 일을 연속해서 겪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 고통을 되풀이하는 심리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심리가 관찰되는데 바로 ‘반복강박’이다
    프로이트가 처음 제안한 이 심리 현상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을 뜻한다. “충동이라고? 너무나 아픈 이 상처를,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반복한 것이라고?? 내가 왜??”내가 지인들에게 혹은 내담자에게 반복강박에 관해 설명하면 항상 돌아오는 질문이다. 사실 이건 무의식의 영역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유사한 삶의 비극을 경험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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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다시 마주하기 싫은 상처를 스스로 반복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가 있는 많은 아이들이 상처받았던 상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표현한다.
    누가 그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생존을 위협받던 기억일 텐데 아이들은 왜 자꾸 그 장면을 그려내는 걸까?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빠 같은 남자를 절대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했는데 또 다시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건 우연일까?
    쉬운 예로 내가 과거에 대머리인 사람 A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A가 사라졌다. 그런데 내 곁에 B라는 대머리인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B라는 사람이 나를 폭행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머리인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그때의 상처와 비슷한 환경에 몰아넣곤 한다. 그래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행한게 너무 익숙해서... 상처 받는게 익숙해서.. 불안한게 익숙해서.. 피해자 역할이 편해서.. 행복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다.
    상처는 무작정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잘 아물지 않는 상처를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한다. 놀랍게도 반복강박은 과거의 상처를 해결하려는 방법 중 한 가지이다.

  • 반복강박의 원리

    그들이 맨 처음 겪었던 첫 번째 상처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 학대, 방임, 외도하는 부모님을 어린 그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상처받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심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과정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후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무모한 도전에 뛰어든다. 바로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첫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웠다면 그 후 비슷한 애인을 만나 그를 바꾸려 하거나 그와 좋은 관계를 맺어 이전 상처를 씻어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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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런 반복강박을 통한 시도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반복된 경험을 대부분은 트라우마로 말하기도 한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p씨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전 연인의 주사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던 p씨는 이번에도 주사가 아주 심한 연인을 만났다.
    p씨는 상처가 반복되는 것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나의 해석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우연 혹은 운명 탓으로 돌렸다.
    “제가 이런 사람인 줄 알고 만났겠냐고요! 처음 만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아무리 봐도 전 그냥 운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문제를 무작정 정면 돌파 할 필요도 없고 나를 탓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p씨는 문제를 인지하고 어느덧 2달이 지났는데도 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반복강박 심리의 진정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시 상처받을 거란 사실을 알아도 그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의식을 조종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만들어낸다. 자신에게 피해자라는 오명을 씌우고 결국 또 상처받게 된다. 물론 반복강박 하나로 힘든 연애를 반복하는 이유가 모두 다 설명될 수 없다.
    과거의 상처에 꼭 정면으로 도전하느라 현재의 시간도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다.

  • 마음가짐

    만약 이런 삶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의 각인된 삶의 방식을 고치는 것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부분은 잘못됐으니 고치세요”와 같은 지시적인 상담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료자와 관계를 통해서 지금 힘든 관계를 상담실에서 반복하며, 반복되는 상황을 인지하고 끊어내며 서서히 나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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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무의식을 들여다본다고 하면 너무 모호하고 개념이 잘 잡히지 않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다. 불편한 순간마다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변화를 하기 위한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이런 일이 과거에도 있었는지 내가 어렸을 때 받았던 느낌이나 현재의 느낌이 비슷한지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다. 생각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여기서도 이미 굳어져 버린 생각의 틀이 있으면 매번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동화됐다고 볼 수 있다. 늘 내가 피해자였고 현재도 피해자이며 다음에도 어차피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인지적 왜곡 같은 생각 말이다.
    반복강박이 해결되지 않아도 된다.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도 된다. 다만 자기 자신과 마주보고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과거의 고통을 돌보고 그 감각이 안전한 감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한다면 반복강박은 멈춰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끊임없이 정면 돌파하며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당신의 무의식에게 담담한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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