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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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마음도 지친다
직장인의 계절성 정서장애(SAD)와 마음건강 관리
글. 오윤선
- 한국성서대학교 기초교양학과 교수(상담학박사/교육학박사)
가을,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는 이유
칼 융(Carl Jung)의 관점에서 가을은 인생의 오후로 진입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젊은 날의 외향적 성취와 사회적 야망에서 벗어나 내면의 무의식을 마주하고 참된 자아를 찾아 자아실현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하였다. 직장인의 관점에서 가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연초에 설정한 목표를 돌아보고 상반기의 업무 수행과 실적을 평가하는 한편, 하반기의 목표 달성과 연말 실적 평가를 준비하고 재조정하는 중요한 전환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일부 직장인은 특별한 이유 없이 피로하고 의욕이 떨어지며 마음이 무거워지는 변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는 계절 자체의 영향뿐 아니라 직장인의 업무 주기와 누적된 심리적 피로가 맞물리면서 나타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상반기부터 이어진 피로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반기 성과에 대한 압박과 연말 결산, 조직 내 평가를 고려한 업무 등으로 긴장도가 높아진다. 이에 더해 인사고과에 따른 승진 문제와 급격하게 발전하는 AI 및 피지컬 로봇과의 협업에 따른 고용 불안정에 대한 우려도 심리적 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계절적 변화가 더해지면 평소보다 피로와 무기력을 크게 경험할 수 있다.
충분히 잔 것 같은데도 피곤하고,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거나 사소한 일에도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 특히 활동량이 줄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귀찮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가을철에 피곤하거나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해서 모두 계절성 정서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수면 부족이나 업무 스트레스, 생활 리듬의 변화만으로도 비슷한 증상은 나타날 수 있다.
SAD는 단순한 ‘가을 우울감’이나 ‘겨울철 무기력’보다 임상적으로 구체적인 개념이다. 특정 계절에 우울 삽화가 반복되고 다른 계절에는 그러한 증상이 호전되는 뚜렷한 계절적 패턴이 중요한 특징이다. 임상적으로는 동일한 계절의 우울 삽화가 최소 2년 연속 반복되는지 등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전형적인 겨울형 SAD는 늦가을부터 겨울에 증상이 시작되어 봄과 여름에 호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가을철에 나타나는 마음의 무거움을 의지나 정신력의 부족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반복해서 우울감과 무기력을 경험하며 수면이나 식욕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면 언제 시작되는지, 얼마나 지속되는지, 매년 반복되는지, 일상과 업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특정 계절마다 우울감과 무기력, 피로, 수면이나 식욕의 변화가 반복된다면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반면 업무량이 많아질수록 증상이 심해지고 휴식이나 업무 환경의 변화에 따라 호전된다면 직무 스트레스나 번아웃과 관련된 문제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을을 자신의 심리와 신체의 변화를 좀 더 세심하게 알아차리는 시기로 보고, 계절적 환경 변화에 따른 생체리듬의 문제인지, 생활 습관이나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문제인지 고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절은 어떻게 우리의 생체리듬과 정서를 흔드는가?
계절성 정서 변화를 이해하려면 계절의 변화가 생체리듬과 수면,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기온 변화보다 일조시간과 자연광 노출의 변화이다.
햇빛은 주변을 밝게 하는 것을 넘어 약 24시간 주기의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조절하는 중요한 환경 신호이다.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면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자연광 노출이 감소하면 수면과 각성의 리듬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하루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는 직장인은 자연광을 충분히 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빛의 변화는 세로토닌과 멜라토닌을 비롯한 여러 신경생물학적 과정과 생체시계의 조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아침의 자연광은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중요한 환경 신호이다. 반대로 낮 동안 자연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서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생활이 반복되면 수면과 각성의 리듬이 흐트러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SAD를 특정 호르몬의 변화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빛의 변화와 생체시계의 조절, 수면과 각성의 변화, 신경생물학적 요인, 개인의 취약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직장인은 계절성 정서 변화에 취약한가?
직장인의 계절성 정서 문제는 계절 자체보다 계절적 변화가 직장인의 생활환경과 결합하는 방식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실내 중심의 근무
많은 직장인은 하루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자연광과 신체활동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 특히 가을과 겨울에는 출퇴근 시간대의 자연광까지 줄어들어 야외에서 햇빛을 접할 기회가 더욱 제한될 수 있다.
둘째, 지속적인 업무 스트레스
성과 평가, 승진 경쟁, 고객 응대, 조직 내 갈등, 업무량 증가 등은 지속적으로 심리적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이러한 스트레스가 이어지면 계절 변화에 따른 정서적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셋째, 부족한 회복 시간
휴가나 주말을 통해 일시적으로 쉬더라도 장기간 축적된 피로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반기부터 이어진 업무 긴장이 하반기까지 지속되면 신체적 피로와 정서적 소진이 함께 누적될 수 있다.
넷째, 불규칙한 신체활동과 생활 리듬
장시간 앉아서 일하고 이동 과정에서도 신체활동이 부족하면 활동량이 감소한다. 규칙적인 신체활동은 스트레스 조절과 정서적 활력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섯째,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약해진 일-생활의 경계
퇴근 후에도 업무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한다면 신체적으로는 퇴근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업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렇듯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디지털 사용 역시 수면과 회복을 방해할 수 있다.
직장인의 정서적 피로는 계절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계절 변화와 직무 스트레스, 수면, 활동량, 디지털 환경, 회복 시간의 부족 등이 서로 겹치는 지점에서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따라서 직장인의 마음건강을 관리하려면 계절을 탓하기보다 자신이 생활하고 일하는 방식 전체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단순한 피로인가, 번아웃인가, SAD인가?
가을철에 피곤하고 의욕이 떨어질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비슷한 증상이라도 원인과 지속 양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일시적인 기분 저하는 누구나 스트레스나 피로,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으로, 대개 며칠 안에 휴식을 통해 나아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증상이 2주 이상 이어지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전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이와 달리 번아웃(Burnout)은 만성적인 직무 스트레스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소진 상태이다. WHO는 번아웃을 ICD-11에서 의학적 질환이 아닌 직업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분류하며, 에너지 고갈, 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나 냉소, 직업적 효능감 저하를 핵심 특징으로 제시한다.
계절성 정서장애(SAD)는 특정 계절에 우울 삽화가 반복되는 계절적 패턴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가을·겨울형은 우울감, 무기력, 과다수면, 식욕 증가와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여름형은 불면, 식욕부진, 체중감소, 불안 및 짜증의 증가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가을철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 이러한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 매년 비슷한 계절에 반복되는가?
- 업무량이나 직무 스트레스가 줄어들면 좋아지는가?
- 수면과 식욕에도 변화가 있는가?
- 취미와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이 줄었는가?
- 일상생활과 업무 수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특히 2주 이상 지속되는 우울감이나 흥미·즐거움의 감소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특정 계절과 증상이 반복적으로 연관되는지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진단을 위한 자가 검사표가 아니므로, 증상이 반복되거나 심해지고 일상생활이나 업무 수행에 뚜렷한 어려움이 생긴다면 전문가의 평가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을의 피로를 무조건 견디기보다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마음 관리의 첫걸음이다.
가을철 마음을 회복하는 8가지 생활전략
계절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계절에 대응하는 생활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기간에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작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첫째, 빛을 가까이하라
가능하면 아침이나 낮 시간에 야외에서 자연광을 접하는 건강한 루틴을 만들어보자. 출근 전이나 점심시간에 잠시 걷는 것도 좋다. 자연광 노출이 SAD의 확정적 치료법은 아니지만 건강한 생체리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습관이 될 수 있다.
둘째, 수면 리듬을 지켜라
계절성 정서 변화에는 잠을 많이 자면서도 피로를 느끼는 경우도 포함된다. 따라서 수면시간을 무조건 늘리기보다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취침 전 스마트폰과 업무 메신저 사용을 줄이고 늦은 시간의 과도한 카페인 섭취도 피하는 것이 좋다.
셋째, 몸을 움직여라
규칙적인 신체활동은 스트레스와 무기력을 줄이고 정서적 활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걷기, 계단 이용, 가벼운 스트레칭처럼 일상에서 지속할 수 있는 활동부터 시작하면 된다.
넷째, 균형 있게 먹어라
겨울형 SAD에서는 식욕 증가와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특정 음식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 규칙적인 식사와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작은 즐거움과 여가를 회복하라
직장 생활에서 성과와 의무만 강조하다 보면 과정의 즐거움과 삶의 의미를 경험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 음악, 독서, 산책, 취미, 여행, 문화생활 등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활동을 일정에 포함해 보자. 하루에 자신을 즐겁게 하는 작은 경험 하나를 확보하는 것도 정서적 회복에 의미가 있다.
여섯째, 관계를 유지하라
마음이 힘들수록 사람을 피하고 혼자 있으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대화하고 일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정서적 지지와 회복에 도움이 된다.
일곱째, 자신의 변화를 기록하라
언제 피곤하고 우울한지, 수면과 식욕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업무량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기록해 보자. 특정 계절마다 비슷한 변화가 반복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전문가와 상담할 때도 유용한 정보가 된다.
여덟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앞서 제시한 전략으로도 우울감이나 무기력이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거나 반복된다면 혼자 견디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SAD의 치료에는 광선치료, 인지행동치료, 약물치료 등이 활용된다. 특히 광선치료는 일반적으로 10,000 lux 수준의 광선치료기를 일정 시간 사용하는 방식이 연구되어 왔지만, 개인의 상태와 기기, 부작용 등에 따라 적용 방법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것이 안전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회복하기 위한 건강한 선택이다.
마음건강은 일터에서도 만들어진다
직장인의 정신건강은 퇴근 후에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공간에서부터 돌볼 필요가 있다. 개인 차원에서는 하루 중 잠시라도 공간을 이동하는 경험을 해보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나만의 ‘짧은 브레이크타임’을 갖는 것이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 자연광을 접하거나, 장시간 앉아 있었다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스트레칭하는 습관을 만들어보자.
특히 중요한 것은 업무와 휴식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퇴근 후에는 심리적 업무 스위치를 ‘off’ 하는 동시에 개인 영역의 심리적 스위치를 ‘on’ 하자. 휴식(休息)을 하며 잊고 있던 나와 만나는 시간은 내일을 위한 매우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직장 내 관계 역시 마음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따뜻한 인사와 격려, 감사의 표현은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조직의 긍정적인 분위기 형성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 차원의 접근이다. 과도한 업무량, 장시간 노동, 낮은 업무 통제감, 조직 내 지원 부족 등은 직업적 스트레스와 소진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건강한 직장 문화는 조직 구성원에게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건강한 직장문화란 지쳤을 때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일의 구조와 환경을 함께 조정하는 문화이다.
직장인의 마음건강은 결국, 개인의 자기관리와 조직의 책임이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가을을 ‘회복의 계절’로 바꾸는 행복 관리
계절성 정서 변화 관리의 목적은 단순한 우울감 해소가 아니라, 계절 변화 속에서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며 행복과 활력을 유지하는 데 있다.
직장인은 업무 성과를 높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자신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노력만큼이나 회복이 중요하다. 일하는 능력과 쉬는 능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게 오래 일하기 위해, 두 능력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휴식(休息)의 한자를 살펴보면 ‘休’는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모습을 나타낸다. ‘息’은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휴식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가을을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계절’로만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점검하고 생활의 균형을 회복하는 계절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를 지치게 하는지, 무엇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지 살펴보자. 일과 휴식, 관계와 개인 시간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도 점검해 보자.
가을철의 무기력은 때로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 그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을 몰아붙이기보다 잠시 멈추어 자신의 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행복은 특별한 사건이나 큰 성취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햇볕을 쬐며 걷는 작은 습관,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균형 잡힌 식사, 따뜻한 인간관계와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건강한 삶의 기반이 만들어진다.
계절은 바꿀 수 없지만,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은 바꿀 수 있다. 건강한 가을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행복한 직장 생활 또한 마찬가지다. 행복은 지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지쳤을 때 회복할 수 있는 삶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